실패로 끝난 온달 장군의 꿈 온달산성
온달산성 관련 사진.. 나보다 훨씬 잘 찍어기에.. 링크 엮음 >> http://blog.daum.net/pjb1223/13349604
온달 산성(아단성)은 그 이름에서 온달장군과 관련이 있다.
여기저기 읽은 내용이 있지만, 이 시점에 출처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ㅡㅡ;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려 했더니만.. 온달산성과 관련된 포스팅에 내용은 없고, 관광사진만 있음..
최소한 안내판에 있는 내용이라도 적어두지.. ( 그럼 난 뭐했지...뷐 )
나중에 출처를 찾게되면 다시 업댓을 기약하며..
온달 산성은 신라에서 쌓은 성을 온달 장군이 그 위에 다시 추가로 쌓았다고 한다.
wiki에서는 온달장군이 이 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적혀있다.
또 온달 산성의 전설에는 온달장군이 죽어서도 그 성을 지키려는듯 그의 시체를 아무도 들어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그의 부인인 평강공주가 와서 온달 장군에서 "이제 그만 떠납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시체를 들어올릴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래되어 오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에는 "바보온달이..." 라고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일설중에 온달은 사마르칸트 출신의 무장으로 당시에는 상당히 선진적인 기병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장수였다고 한다.
사마르칸트 라면 터키인의 조상인 돌궐의 영향력하에 있던 지역이였고 고구려와 함께 중원지역을 견제했던 동맹 세력이였므로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이주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고려(이때는 고구려라는 국명을 고려로 변경한 이후임)말에 익숙치 않아 말투가 어눌했고 이때문에 바보라 놀림을 받았을거라 추측되기도 한다.
온달 산성은 태백산맥에서 시작되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온달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의 일반적인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1. 산정장을 한 바퀴 둘려쳐 쌓은 테뫼식 산성이고,
2. 성벽의 높이가 높고 성벽위에 방어용 옹벽이 없으며(지금의 우리는 성이라 하면 당연히 떠올리지만..)
3. 출입구는 그냥 담벽이 단절된 형태이며,
4. 주위를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온달산성은 정면에 보이는 남한강을 확보하기 위하여 남한강과 남천이 만나는 지점의 꼭때기를 둘려친 테뫼식 산성으로 쌓아졌다.
온달산성을 통해 확보하려 한 남한강은 삼국간의 주-전선인 한강과의 연계성이 있다.
신라 진평왕에게 한강을 뺏앗긴 고려(고구려)는 다시 한강을 확보하려 했고, 이에 온달 장군은 한강에서의 정면 충돌 보다는 우회하여 신라가 한강으로 향하게 하는 출구 자체를 봉쇄해서 한강에서 신라가 물러나기를 노렸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봤던 삼국 시대의 국경선은 단지 계략선인 국경선으로 삼국 시대의 국경선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매우 변동이 잦았다.
내가 추측해본 온달장군 시대의 국경선은 다음 지도와 같다.
장수왕 시절에 최대로 남하했던 고려(고구려)는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웠고 이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위 지도 처럼 중간이 위로 쏟구쳐 오르는 상태로 변경되었다.
이때 신라 진평왕은 단양에 단양 적성비를 세웠는데, 중원고구려비와 단양 적성비는 충주호의 서로 양끝단에서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 세워져 있다.
온달 장군은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한강을 통한 정면 돌파가 아닌 한강 바깥쪽을 우회해 들어가서 신라가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이는 실제로 없는 산맥이라고 하지만, 설명의 용이를 위해 사용..)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를 막아버려 한강 유역의 신라군을 고사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빨간 화살표가 온달 장군의 진출로로 춘천-원주-제천으로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진출했다.
이를 통해 신라군의 북쪽 통로인 죽령을 봉쇄할 계획이었다.
온달 장군이 온달산성(아단성)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다음지도처럼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래쪽 빨간 점선의 방향으로 진출 남한강으로 통하는 진출로를 절단해서 남한강을 통해 한강으로 진출한 신라군을 봉쇄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 한반도 중원의 영역은 장수왕 시절 버금가는 영역으로 되돌려졌을 것이다.
온달 장군의 최종 계획은 다음 지도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세가지 불확실성이 있었다.
첫째는 진평왕이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
삼국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였지만, 영토를 확장하지 않으면 자신의 세를 불릴수가 없고, 그러다보면 기존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또한 진평왕은 온달장군의 계획을 알아챘다는 것이다.
온달 산성의 위험성을 매우 심각하게 이해했고, 결국 다음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온달장군을 제거함으로써 고려(고구려)를 좌절 시켰다.
둘째는 온달장군의 진격로로써 춘천-원주-제천으로 이어지는 육로는 한강을 통한 수로 이동에 비해 매우 불리하다는 점이다.
비슷한 사례로 러시아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전쟁이였던 크림전쟁을 들 수 있는데,
러시아는 자신의 영토와 맞붙어 있는 크림반도까지 육로로 부급품을 수송하는데 무려 3달이 걸렸고, 훨씬 더 먼거리임에도 영국은 배로 보급품을 수송하는데 2주만에 도착했다.
육로로 보급을 이어가다보니 지속적인 전력강화가 매우 힘들어지고, 이는 바로 죽령너머에서 보급품을 이동하는 신라에 비해 불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째는 대륙의 위험이였다.
장수왕 시절부터 중원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고려(고구려)는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함으로써 전쟁의 불가피성을 깨닫고 있었고, 중원과의 전쟁에 대비해 남쪽 국경의 안정화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다.
남쪽 국경의 안정화는 한강을 확보함으로써만 가능했고, 고려(고구려)는 시간이 없었다.
빨리 남쪽 국경 작전을 끝내고 중원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시간을 갖고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한 이후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달장군은 단 한방에 신라를 한강에서 몰아내려 했던것이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한 것이다.
온달산성에서 바라다본 신라쪽 죽령인근
온달장군의 작전 실패와 이후로 끝없이 이어지는 중원과의 전쟁으로 고려(고구려)는 더이상 한강 유역 쟁탈전에 참여 할 수 없었고, 신라는 고려(고구려)로 부터 한강을 확실히 확보함으로써 강력한 국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백제, 고구려, 중원의 삼각 관계속에 한강을 확보한 '신라'라는 또 다른 한 추가 추가됨으로써 더욱더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온달 산성은 충북 제천의 한 산봉우리에 있는 돌무더미에 불과하지만, 이 돌무더미 속에는 수많은 이해 관계와 그것들은 포함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