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반란 사건
예전에 1박2일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제주도 일주하는 여행을 보고 몇몇 네티즌 들은 제주도의 4.3 사건을 추모하는것 아니냐? 라는 추측을 했었다.
--<여순반란사건 위령비>--
현재의 우리는 4.3사건이라든지 여순반란사건 과 같은 일들에 대해 잘 모른다.
잘 모르는것에 대해 우리는 그 사건들이 막연히 남한내에 있던 좌익 빨갱이들에 의해 벌어진 폭력사건쯤으로 알고 있다.
사실, 이런 현실 자체가 분노할 수 밖에 없다.
왜 이런일들이 이렇게 왜곡되고 외면되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점에서 말이다.
어떤 전화를 받으시고 순천에 다녀오신다고 하셨던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한다.
전화를 받고 순천으로 떠나시던 그때가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기간이였다.
--<LIFE지에 실린 여순반란사건, 토벌군-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 흰띠를 메였으나 4연대가 반란군인 14연대에 합류함으로써 구별의 의미가 없어졌다>--
독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는 과거 때문이라 했다.
대한민국의 첫단추가 친일매국노에 의해 꾸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게 되면서 알지 못하는 과거의 독립운동의 역사중에는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들이였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공산주의를 좋아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볼셰비키 공산당 사상에 기여한 조선인 여자 독립군인 "김 알렉산드라 스탄게비치"도 있었다.)
--<중국 홍군의 조선인 영웅인 양림과 이추악>--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 전쟁을 하기전까진(최소 일본의 쇼와시대에 접어들기 전까진) 일본과 미국이 조선과 필리핀을 서로 사이좋게 나눠먹을 정도로 미국과 일본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맺고 돌아오는 실무 책임자 스티븐슨을 암살한 조선인 장인환-전명운,
이승만은 이들의 통역을 요청받았지만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런 와중에 독립의사들은 만주로 피신하게 되었고, 다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일부는 소련으로, 일부는 보다 더 서쪽의 중국의 내륙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으로 이주하신 분들은 당연히 소련공산당과 협력하게 되었고, 중국 내륙으로 이주하신 분들은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이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남은 선택은 모택동의 홍군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분들은 중국의 홍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임시정부에서는 결국 공산당을 축출하긴 했어도 그들의 독립운동을 인정했다.
--<인천 상륙작전시 맥아더 옆에 서있는 하지 중장>--
한편 맥아더는 오키나와에서의 힘겨운 싸움을 끝내고 일본 본토로의 진공을 준비하면서 그의 심복이였던 하지장군에게 조선을 접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대부분의 미군이 마찬가지겠지만, 하지 역시 조선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하지가 조선에 상륙하자 조선에 아무런 기반이 없던 하지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본의 군대만 무장해제시키고 그외의 경찰/행정 조직은 그대로 일본인 + 일본에 협력했던 매국노 조선인들이 담당하도록 했다.
--<총독부 앞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있는 미군! 아베총독으로 부터 식민지 이양문서를 받았으나,
조선인들로 부터 "일본인을 구하러 온 미군!"이란 비아냥을 받았다>--
그러다 조선의 독립에 반대하며 하와이에서 조직되었던 광복군의 활동을 회방하고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광복군을 협박했던 이승만이 해방 후 독립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독립군의 기반도 국내의 조직도 아무것도 없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정부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지에게 요구했고 하지는 미국인이나 다른없던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이승만은 지지기반이 없는 이 조선땅에서 보복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친일매국노 세력을 껴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일제치하 조선땅에서의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자들로 이미 착실히 차지하고 있던 완전한 행정력으로 이승만을 보필했다.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 -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봉준, 유동열, 김원봉>--
그리고 그 이전 미군의 실수로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남쪽에는 친일매국노들이 세력을 잡았으나 일제시절 공산당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조선인 공산당원들은 북쪽의 권력을 소련으로부터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북쪽을 차지할 조직도 있었고, 당당한 명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소련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생전 듣도보고 못한 새파란 어린놈의 쉬키에게 리더자격을 줘야 한다는 점이였다.
--<듣보잡 독립운동가 김성주, 그래도 그는 자주성을 확실히 확보했다>--
어쨋든 그런 와중에 제주도에서 남북 각자 정부를 세우려는 선거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배경에는 처단되지 않는 친일매국노들에 대한 자체 처리운동의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 경찰에 의한 무력진압으로 촉발된 제주4.3항쟁이 시작되었다.
--<사살당한 14연대 병사들 - 친일인사 800여명을 학살했으나 이후 국군은 보복적 학살로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4.3사건 진압명령은 여수에 있던 14연대에 출동 명령이 떨어졌으나 좌익 장교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순천으로 이동하여 공무원등 우익인사 800여명을 학살했다고 하여 시작된 여순반란사건으로 이어진다.
바로 여순반란사건은 35년간의 일제치하, 해결되지 못한 매국노에 대한 처단을 위해 벌어진 사건이다.
아직도 사전에는 공무원등 우익인사라고 표현되고 있으나,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일제식민시절 일제에 협력했던 바로 그 친일매국노들이다.
이승만이 반민족특별위워회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해산시킴으로써 매국노 처벌이 물건너가자 자나깨나 친일파 처단을 기다리던 국민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빨갱이의 굴레를 씌우고 또 매국노들에게 우익이란 칭호를 하사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우익의 후손의 협력자인 어떤 여인네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며 출마하였다..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최선을 다해 시정을 이끌겠지만, 정상적인 국가라면 결코 존재할 수 없어야할 인물들이 이땅의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1992년 반환된 부천 미군기지부지를 나경원 판사께서 친일파 후손에게 돌려주셨다>--
P.S : 프랑스는 독일에 협력했던 자 60만명을 채포했고, 그중 18,000명에 사형 선고를 내렸고, 그 중 8,000명을 처형했다.
중국은 일본에 협력한자 100,000명을 처형했고, 필리핀, 베트남 등도 친일매국노를 대량 처형했지만,
우리는 단 한명의 친일매국노도 처벌받지 않았다.
처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놓치않으면서 사실상 사회권력속에 끼려면 친일파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안으로 진입하지 않을수 없도록 된 것이다.
노골적으로 친일파를 옹호했던 이승만에 의해 친일파들은 모두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