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외교력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서희이다.
서희는 당시 송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했다.
거란은 당시 북진정책과 대송 외교노선을 천명한 고려에 위협을 느껴 중국으로 진출하기전 고려를 묶어둘 목적으로 80만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그러다 안융진에서 발해 유민들의 소위 민병대에게 대패하면서 서희와의 협상장에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서회는 말발로 강동6주를 차지했다 하여, 우리 역사상 외교의 달인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고려정부는 맞서 싸우자와 평양이북을 넘겨주고 화친하자로 나뉘던 형편없는 국제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나마 서희는 안융진의 전투로 거란의 침공 목적을 간파하게 된다.
<귀주대첩 - 그러나 이 그림은 고증에 좀 문제가 있어보인다. 내가 보기엔 조선군을 닮은 정체모를 군대로 보인다.>
그러면 거란은 서희에게 농락당한 것일까?
아니 내가 보기엔 진정한 승자는 거란이였다.
어차피 서희가 차지한 강동6주는 거란의 땅도 아니였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발해의 영향력이 있어서인지 그 지역의 주민들인 말갈족 즉 여진족은 대부분 고려의 편이였다.
그리고 이 여진족은 거란의 침공을 미리 고려정부에 알려주고, 거란군의 동태 첩보도 제공하고 있었던 고려의 편이였다.
서희가 차지한 땅은 바로 이 여진족의 땅이였다.
서희는 적국인 거란의 땅을 차지한것이 아니라 같은편이였던 여진족의 땅을 차지함으로써 여진족이 고려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든것이다.
또한 송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다른쪽 위협인 고려군이 거란의 후방을 치는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거란은 후방의 위협없이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그 덩치를 키우고 차후 벌어지는 고려-거란과의 대규모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 - 주은래의 환영 >
닉슨 대통령이 19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경제적으로는 금본위제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지만,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미군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였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 남-북에 어떤한 통보도 없이 상호 미중수교를 맺음으로써 남북한에 충격을 주게 되었다.
남한은 미국을 북한은 중국을 믿을수 없다는 점에서 상호 컨센서스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 미중수교에 분노한 남북간의 산물인 7.4남북공동선언 -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과 만나고 있다.>
그래서 남북한은 7.4남북공동선언을 하게 된다.
물론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쇼였고, 북쪽의 김일성도 남쪽의 박정희도 서로 자기의 영토에서 불안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하여 7.4남북공동선언이란 두 지도자간의 휴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후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역사적인 남북 지도자간 회합이 예정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이 사망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급변했다.
빌클린턴 미 대통령은 동부전선에 핵포탄을 투하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하니,
(그런데 그런 미군의 계획을 한국 정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전시작전권 때문임..)
그리고 이어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시작되었다.
자주적 통일, 상호신뢰구축, 1국가2체제 등의 내용이 있는 6.15선언이 발표되었다.
실제로 대북 지원액이 이전 김영상 정부보다도 적고, 현 이명박 정권보다도 적음에도 퍼주기라는 소리를 듣고 있던 대북 지원 사업은(사실 퍼주기라고 욕을 듣는것은 대북-전략적 차원에서 나쁘지 않다.. 실제로 몇푼 들이지 않고 엄청나게 생색낼 수 있다.)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 진정한 효과란 무엇일까?
< 모양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른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
첫째, 북쪽에 남한 노선의 라인을 깔 수 있다.
그 이전까지 북한내부는 친중,친러 두개의 노선이 있다가 사실상 친러 노선은 지리멸렬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대남 경제 담당자들을 중심으로 친남 노선이 생겼났다.
이것은 결국 정치적 타협과 북한 내부 정보를 선취득 할 수 라인이 생긴것이고, 행여나 발생할 우발적 사건도 쉽게 무마할 수 있는 루트가 생긴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북한 내부의 권력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것이다.
뭔가 공작을 시도할수도 있고 남쪽의 지원을 빌미로 북쪽 권력 집단에 친남 인사를 더욱더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정작 햇볕정책, 소위 대북-퍼주기 시절인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군의 군비 확장이 건국 이래 가장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김대중 정부 시절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다는 것은 다들 아는 얘기다.
왜 껄끄러웠을까?
대부분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때문에 사이가 나빠졌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햇볕정책은 클린턴 정부도 적극 지지하던 정책이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문제는 미사일 사거리 연장이였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 출범때부터 지속적으로 탄도 미사일의 사거리 연장을 요구했다.
(이 미사일 사거리 문제는 전두환이 독재를 하면서 미국 정부로 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즉 "난 전쟁의 의지가 없소"라는 표현으로 미국에게 사거리 제한을 약속한 것이다.)
< 이 사진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진실을 말해서도 안된다.>
김대중 정부는 500km이상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300km로 합의를 봤다.
500km는 북한 주요 지역을 사거리로 둘 수 있고, 300km는 평양을 사거리로 둘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김정일 사망 뉴스에 가려졌지만, 오늘자 뉴스에 팝아이 미사일의 배터리 불량 기사가 떴다.) 이스라엘로 부터 공대지 미사일인 사거리 120km 팝아이 미사일을 수입했다.
이것은 당시 우리군의 주력 전투폭격기였던 KF-16이 서해의 공해상으로부터 날아가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였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KF-15 도입이 결정되었다.
KF-15는 F-15E 슬램이글의 개량 버전으로 주야간 장거리 중폭격이 가능한 전투폭격기이고 결정적으로 지하벙커를 공격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를 운영할 수 있는 기종이다.
< F-15K의 운용 무장들, 이 사진에 있는게 다는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국방정책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평양 직공"이다.
국방의 핵심정책을 휴전선상의 대규모 전투가 아닌 평양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지도부(김정일)를 위협하겠다는 것이고, 이것은 햇볕정책의 보이지 않는 뒷면인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북핵 기사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북한이 서해상으로 발사 실험을 했던 KH-22NA 미사일은 고강도 도발이나 엄청난 정치적 후폭풍을 물고올 핵탄두 탄도 미사일 보다는 현실적으로 서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남한의 현무 시리즈 미사일의 대항 미사일로 이 미사일 역시 그 당시 치열했던 남북간의 군비경쟁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모든것이 햇볕정책의 와중에 있었던 보이지 않는 뒷면이다.
그리고 6.15선언에는 7.4남북공동선언에 비해 빠진게 있다.
그것은 평화적 통일에 대한 문구다.
6.15선언에는 신뢰구축이라고만 되어 있고 평화통일이란 말은 사라졌다.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의 10.4남북선언에는 추가됐지만(평화통일이 아닌 평화구축으로..), 6.15선언에는 이 부분이 없다.
< 사거리 제한에 해당되지 않는 크루즈 미사일인 현무-3C 순항 미사일, 차후 사거리 3,000km 순항 미사일까지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 사거리 제한이 없는 크루즈 미사일이 개발되고 실전배치 되기 시작한다.
(현재는 사거리 1,200km이나 3,000km 이상의 미사일도 개발중이다.)
이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할 플랫폼으로 이즈함이 도입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방계획에 의하면 6척의 전투함으로 구성된 기동함대 3개를 보유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모두 뒤집어 엎어버렸지만..)
그리고 이 모든 국방정책을 완성시킬 마지막 부품인 고고도 정찰기 사업을, 이명박 대통령께서 취임후 텍사스 방문시에 모두 엎어버리셨다.
(이라크와 아프칸에 국군을 파견해가며 얻어낸 그것을..)
< 이명박 대통령께서 췬히 텍사스까지 날라가셔서 뒤집어 엎어버린 "글로벌 호크" 고고도 무인 정찰기, 몇년이 지난후 뒤늦게 필요성을 깨닫고 사려고 했더니, 이젠 미국이 무려 4,000억원을 불러버린... 미치지 않고서 그 돈을 주고 저걸 사진 않겠지..>
오늘 김정일 사망했다.
죽을라면 좀 일찍 죽던가, 아니면 쫌만 더 참다가 나중에 죽던가 할 것이지..
그러나 결국 드러난건 대북 정보의 부재였다.
이토록 중요한 사항을 국가정보망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니...
거란이 침입한 줄도 모르고 있고, 무엇 때문에 침입한줄도 모르는 무능한 고려정부와 다를바가 없다.
지금까지 햇볕정책이 지속되었더라면 그리고 국방정책이 지속되었더라면 사전에 정보를 얻을수 있었을 것이고, 또 가능하다면 남쪽의 주도로 북쪽의 급변사태를 조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젠, 주도하기는 커녕 중국과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가 되버린 이 한심한 상황이라니...
자존심 상해서, 기분 나쁘다고 햇볕 항아리 걷어차버리고, 쓸만한 카드 한장 없이 남의 손가락만 쳐다봐야 하는 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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