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역사

고조선은 왜 소멸되었나?

메롱씨티 배드맨 2014. 3. 7. 15:06

(고)조선은 왜 소멸했나 ???



(고)조선은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고, (고)조선의 역사 대부분을 포함하는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국립 박물관들 조차 역사 연표를 싹뚝 잘라먹기 일수다.

남양주에 있는 기원전 2700년경의 고인돌에 꼬마 아이들이 우르르 올라가 부모들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고)조선의 역사를 단순히 신화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 시기의 역사물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 그 반만년 역사의 반을 (고)조선이 차지하고 있다.

기원전 2333년에 국가가 세웠졌다, 근데 그 (고)조선은 언제 사라졌지?

(고)조선 건국의 기원은 알지만, (고)조선이 정확하게 언제까지 존재했으며 그래서 정확히 얼마의 기간동안 존재했던 국가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고)조선이 붕괴되면서 여러 국가로 쪼개지는 시대인 열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대는 B.C 100 이후이다.

이후 500여년간 열국의 시대를 거쳐 이후 신라-고구려-백제(건국연대순)의 삼국시대로 들어선다.





(기원에서 부터 삼국시대까지 연대표)


그렇다면 (고)조선은 외부의 침입도 없었고, 내부의 반란과 같은 강한 임팩트가 없었는데도 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된것인가?

일단 고조선이란 나라부터 시작해서 알아보자.




1.(고)조선에 있던 나라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세워져서 마지막 흔적이 기록된 서기 300년대까지 대략 2700년간 유지되어 왔다.

 (고)조선 붕괴후에도 단군의 후예가 열국시대에 고구려 남쪽에 여전히 존재했다.


<후한서-동이열전>,<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의 남쪽은 조선이다



   최초에 지금의 평양(아사달)에서 건국되어 총 4번 수도를 천도했다.

   여기서 평양이란 지금처럼 "고유명사"가 아닌 "수도"와 같은 일반명사로 쓰였다고 한다.

   그말은 고조선은 총 4개의 평양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지막 평양 천도를 "되돌아 왔다"라고 쓰여 있으니 최초의 평양이였던 곳으로 그들의 평양을 되돌렸던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고)조선에는 총 3개의 평양이 있는 셈이다.

   기원전 1200년경에 기자의 망명으로 (고)조선 서부 (지금의 북경이남-과거의 요서지역)에 조선땅에 살게했다(기자가 터를 잡았던 "조선"지역은 그곳 지명이 "조선"으로 국가를 칭하던 (고)조선과는 다르다).

   그리고 (고)조선은 평양을 천도했다.

   위만의 침입으로 기자조선이 멸망하자, 다시 동쪽으로 평양을 천도했다.

   

<삼국유사>,<위서> 에서는 고조선의 첫번째 수도를 "아사달"로 표기, <고기>에서는 평양으로 기록, 

즉, [아사달|평양 > 백악산아사달 > 장당경 > 아사달] 로 기록하고 있다.

왕검성은 거수국 왕의 도읍을 말하는 일반명사.


   (고)조선을 평양을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어보자면 

   a.대동강 평양(초기)

   b.요서 평양(최 전성기)

   c.요동 평양(쇠퇴기)

   d.대동강 평양(소멸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조선의 전체 영역)


  - 북부


    위만의 침입으로 요서에 있던 거수국들이 대대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던 시기의 민족 대이동을 기초로 살펴보자면

    주요 세력은 조선, 고구려(주몽이 건국한 고구려 아님), 부여, (예)맥이 눈에 띈다.

    위만의 침입 이후 동쪽으로 이동한 조선족은 눈에 띄지 않지만, 이외에 고구려와 예맥은 직접적으로 확실히 동쪽으로 이동했고, 이들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부여도 이때 동쪽으로 이동했다.

    예맥은 숙신-말갈-물길로 이름이 바뀌어왔고,만주,간도,연해주,함경도,강원도 북부로 이동했다.

    고구려의 일부는 한반도 북부로, 일부는 부여가 이동한 북부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대표적인 지명이 낙랑, 대방등으로 요서지역에서 사용하던 지명을 한반도에서도 사용함으로써 같은 이름이면서 다른 지역이 사서에 종종 등장한다.


  - 남부


    한반도에는 마한이란 거대 세력 아래에 마한,진한,변진 지역으로 구분되고 그 내부에 많은 거수국들이 존재했지만, 많은 거수국들의 왕은 모두 마한 진왕(마한의 통치자 호칭)의 후손이였다.

    즉, 마한지역은 오로지 하나의 지배 가문에 의해 통치되었던 지역이다.


<후한서-동이열전>,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韓(한)에는 세 종족이 있었으니 첫째는 馬韓(마한), 둘째는 辰韓(진한), 세째는 弁辰(변진)이다.

... (韓 가운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辰王(진왕)으로 삼아 目支國(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제 三韓(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는데 (韓의) 諸國王(제국왕)의 선조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은 (고)조선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기 전까진 평양 이북 청천강까지를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으나, 위만의 침입으로 요서 지역의 많은 거수국들이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한강 이남까지 물렀나게 되었다.


<제왕운기-고구려기> 고구려는 마한의 왕검성에서 나라를 열었다. - 제왕운기 저자 주석 "지금의 서경(평양)이다" -


  (고)조선이 급속도로 붕괴하던 기원전 100년 이후 (고)조선내 강역에 존재하던 수많은 거수들이 사실상 본의 아니게 독립되어 버림으로써 드디어 "열국시대"로 진입하게 되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이 열국시대의 승자는 신라-고구려-백제(건국순) 였다.





2.(고)조선의 성격


  고대에서 국가라 함은 "통치자 + 율령(통치법)"으로써 군장사회가 아닌 "국가 사회"로 분류한다.

  그리고 거기에 "국가-조직"를 더하면 "중앙집권 국가"라 할 수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건국할때 단군이라는 통치자와 8조법이라는 율령을 가진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로 출발했다.


 - 법치국가


    홍익인간이란 기치아래 8조법의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사회로 출발했다.

    고대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법을 어길시 그 형벌은 사형, 사지절단, 노예화 등으로 매우 가혹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혹한 형벌이 있었기에 안정된 사회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형벌중 노예화라고 칭한 부분에서 고조선 사회가 신분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신분제 사회라는 것은 사회가 분업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하위에 하부 지역장이 있었는데, 이런 계층적인 신분구조가 있었다는 것은 국가사회로 완벽히 진입했음을 반증한다. 


  - 거수국가


    (고)조선은 거수국 체제다. 중세시대의 제후국과 같은 의미이다.

    (고)조선은 중앙국가이고, 그 하위에 거수국이 있고, 그 거수국들은 다시 내부에 또 다른 거수국들로 구성되고, 거수국들은 "마,부,호"로 분류되는 행정 단위를 가지고 있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열전-한전> 여러거수국에는 거수가 있었는데, 강대한 자를 거수라 하였고 그 다음을 차례로 신지,검측,번치,살해라 하였다.

이것은 각 국읍의 거수들의 작위였고, 별도로 천군이라는 종교지도자 계급이 있었다.


    마한처럼 수많은 거수국의 왕들 모두가 자신의 혈족인 거수국이 있는 반면, 혈연적 관계가 없는 거수국들도 있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무력이나 강압에 의해 거수국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종교국가


    고조선 사회는 무력이나 강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가 아니였다. 공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으로 조선(그 당시엔 "기자조선을..")을 이야기 했던 바가 이것이였을 것이다.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통치가 아니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중국의 "만리장성"같은 중후장대한 구조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무엇으로 통치되었나, 바로 종교로 통치되었다.

    (고)조선의 단순은 통치자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이자 "제사장"이였다.

    고조선은 모두 거수국 체제였지만, 지방 거수국 제후들이 갖지 못한 한가지는 바로 "제사장"이였다.

    지역 거수국에는 통치자와 종교지도자가 따로 있었지만, 단군은 통치자이자 종교지도자였다.

    통치자 왕은 명령을 내리지만, 단군은 신의 계시를 전하는 사람이였기 때문에 강압과 무력은 무의미 했던것이다.

    중세시대 로마교황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로마교황은 이교도가 있었던 반면, 단군은 종교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조선이 한반도 전역, 만주와 중국의 동부까지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오랫동안 단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단일 종교와 그 종교로써 파생되는 동일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열국사연구> 고조선에는 종교가 정치보다 위에 있어서 단군은 종교의 권위로 국가를 통치하였다. 따라서 단군은 종교의 최고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정치의 최고 권력자였던 것이다.




마호메트 사후 그가 이룩한 종교국가의 최고 수장인 칼리프에 선출된 "아부 바크르"

이슬람은 최고 종교 지도자 칼리프 아래에 군왕을 뜻하는 "술탄"이 존재한다.

고조선이 이와 비슷한 구조다.





3. (고)조선의 역사의 흐름 


  - 중국의 비단길 


    중국은 (고)조선보다 100년후에 국가가 탄생했다. 그리고 거의 2000년간은 (고)조선에 비해 세력이 열세였다.

    그랬던 이유는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중국보다 먼저 접어들었고, 더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역으로 통하는 비단길이 열리면서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통하기 시작했다.

    비단길은 비단이라는 상품을 매개체로 문화와 정보 기술과 역사가 공유되었다.

    반면 북쪽으로는 동토, 동쪽에는 아직 문명이 개화되지 못한 왜, 등 정보의 소통이 창구가 없다보니 중국에게 점차 문화적, 기술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나라 장건이 흉노의 침입을 막고자 대월지국에 동맹을 맺으러 가는 길이 비단길의 시초가 되었다.)



  - 철기의 발달


    기원전 8~7세기에 철기시대로 접어들었고 기원전 3세기에 강철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철기의 출현은 기존의 사회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는데, 그중에서도 농기구의 변화에 일대 사건이 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기가 매우 귀하고 비싸서 일부 지배층만 사용하였고 주요 기구는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철기는 이 석기를 대체하게 된다.

    농기구가 석기에서 철기로 바뀌면서 석기로는 개간이 불가능 하였던 수많은 땅들이 철기를 이용해 농지로 개간할 수 있게 되면서 땅에 대한 의식이 변하게 되었다.

    철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거수국들간의 영토분쟁이 발생하게 되고 이런 분쟁이 누적 되다보니 강력한 무력으로 통치되던 국가가 아니였던 (고)조선은 결국 와해될수 밖에 없게 된다.




(본격적인 철기 농기구의 사용 -  석기 도구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 위만의 침입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망명하게 되고 그가 자신의 세력으로 기자조선국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중국의 역사)을 세움으로써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고)조선은 커다란 사회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미 이전 연나라의 침입시에는 연나라를 몰아내고 오히려 연나라의 영토내로 진격하여 영토를 더 확장할 수 있었지만, 위만의 침입시에는 중국이 예전에 그 중국이 아닌데다가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강해지고 (고)조선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가고 있는 상태였다.

    기자조선의 인접 거수국들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기자조선의 준왕은 그 세력을 이끌고 마한으로 망명하면서 (고)조선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 내부 이동


    위만의 침임 그리고 한나라가 그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더 이상 요서지역에 살수 없게된 거수국들이 동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직접적인 침입을 받지 않았던 북쪽의 부여도 사방이 포위되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북부여로 이동하게 된다.

    진왕세력에 의해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가던 마한지역도 기자조선 준왕의 망명세력과 북쪽에서 밀려들어오는 동쪽 거수국들로 그 영토가 확 쪼그라들게 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동쪽으로 이주 한 것은 가섭원으로 나라를 옮기라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라 했다

<사기-화식열전> 무릇 燕(연)은 발해와 갈석 사이의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오환,夫餘(부여)와 이웃하였다. (즉, 부여는 연의 북쪽 북경 위쪽에 있었다.)

<후한서>, <삼국지> 부여는 長城(장성-만리장성)으로 부터 천리 떨어져 있다. 

(즉, 사기(B.C 140년) ~ 후한서(A.D 25년) 사이에 부여의 위치가 천리만큼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즉, 부여가 160여년 사이에 천리만큼 후퇴했음을 의미한다.)




(이차돈의 순교 - 이는 법흥황과 이차돈간의 작전이였다.

하느님 종교관은 고조선 붕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느님 종교의 마지막 신수자였던 신라는 불교에 격렬히 저항했으나, 대세를 돌이킬순 없었다)

 




4. 종교의 붕괴


  - (고)조선의 소멸


    고조선은 직접적인 침략, 강력한 내란의 충격이 없었음에도 서서히 소멸하게 되는 이유는 중국의 대두와 침입으로 인한 내부 혼란, 철기 문화의 발달, 이로 인한 종교권위의 약화가 원인이라고 본다.

    철기 문화의 발달로 인해 큰 영토와 많은 인구를 거느린 거수국들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고, 위만의 침입으로 동쪽의 거수국들이 밀려들어 영토가 좁아지고 이로인해 거수국들간의 분쟁이 발생한다.

    그러나 단군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실제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단군의 말빨은 더 이상 거수국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이로 인해 단군의 종교적 권위는 더욱더 추락하게 된다.

    이때까지 이르게 되자 이제는 누구도 단군의 권위에 복종하려 들지 않고, 누구도 단군에게 자신의 행동을 보고하지도 지시받지도 않는다.


    즉, 중국의 대두, 철기 문화의 발달, 영토 상실로 인한 내부 혼란 증가가 단군의 종교적 권위를 뭉개버렸으며, 종교적 권위로써 통치하던 고조선은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