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역사

임라일본부설

메롱씨티 배드맨 2007. 3. 23. 12:30

일본이 역사 왜곡을 했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어떤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문니다.

그래서 일본의 역사왜곡의 가장 핵심인 임라 일본부설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1.임라 일본부설의 등장 


- 임라 일본부설은 일제 강점기 시절 처음으로 제기 되었습니다.

  중국과의 전쟁을 위해 만주지역을 정찰하던 일본군 장교에 의해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됩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일본군을 막기위해 신라에 5만의 병력을 파병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일본의 임라 일본부 설이 제기된 원인이 됩니다.

  

  일본의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고구려가 신라에 5만의 대병을 파병했다면 일본군의 규모도 그 비슷한 정도였을 것이다.

  -- 서기 4~5세기에 수만의 병력을 일본에서 한반도로 출병시키기에는 당시의 해운 상황이나 여건상 불가능하다.

  -- 그래서 아마도 일본과 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지역에 일본의 식민지역이 있었을 것이다.

  -- 또한 임라 일본부설의 물증으로 백제왕 근초고왕이 일본 천왕에 보낸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가 일본왕이 백제왕에게서 상납 받은 것인지 하사 받은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즉 "하사"받은것인지 "상납"받은것인지의 내용은 

       이후에 의도적으로 지워진것으로 보이고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것이 임라 일본부 설입니다

 


2. 광개토대왕 이전 일본과 신라의 관계


사실상 일본의 역사는 가야 지역에서 이주한 도래인에 의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일본은 가야와의 무역으로 생활을 이어나갈 정도로 가야에 경제적 문화적으로 종속적이였습니다.

그러한때에 신라가 부족국가에서 그 지역의 신흥 패권국가로 등장하면서 가야에 대한 무력적 압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가야에 모든것을 의존하고 있던 일본으로써는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대략 40년에 20여 차례 평균 2년에 한차례 정도의 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역사에는 이런 일본의 침입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뭉뚱그려 몇차례 침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침략은 했으나 그 수준이 미미한 지경이였기 때문입니다.

신라도 일본의 잦은 침입에 골치를 썩히고 있으나 신라가 일본을 정벌하지 못한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1) 일본까지 가는 항해에 자신이 없었고,

2) 일본으로 가더라도 사실상 실체가 없는 일본을 어딜 공격할것가가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 일반적인 전투는 대부분 우두머리가 있는 수도를 공략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 일본은 수도와 같은 거점 전력 단위가 없었습니다.)

 


3. 고구려의 위기


고구려의 15대왕 미천왕(이왕의 이름이 이렇게 미천한대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ㅎㅎ)시절 고구려는 중국의 연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고국원왕 시절 고구려는 연나라의 공격으로 왕의 어머니와 부인이 포로로 붙잡히고 고국원왕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묶고 무릎을 끊고 항복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고구려는 연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지기에 이르릅니다.

 


4. 백제의 북진


이런 고구려의 위기는 남쪽 백제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즉시 북진을 준비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 백제의 북진 준비 과정에 있습니다.

어떻게 근초고왕은 북진을 준비했을까요?

- 1) 미정복지인 마한 지역 복속 

- 2) 북진한 이후 신라로 부터 빈집털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동쪽지역에 우호세력 확보

마한은 정복은 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미 백제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세력의 견제는 사실상 쉽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전쟁을 위해 또 다른 전쟁을 할 순 없기 때문에 외교적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대상은 가야였습니다. 즉 가야를 통해 신라를 견제하려 했던것이죠.

그러나 백제와 가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때에 가야는 신라로 부터 공격을 당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때 백제가 동맹을 맺자고 다가왔지만 가야 입장에서는 신라나 백제나 그넘이 그넘인 상황이였죠.

그래서 백제는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본인에게 접근합니다.

가야와 백제의 동맹을 도와주면 가야와의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보장하고 또한 백제의 선진문물도 전수해 주겠다는 제안합니다.

이리하여 일본인들의 협조로 가야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가야를 백제의 동맹으로 맺습니다.

협조의 댓가로 백제는 (국사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왕인 박사를 일본에 보내 문화를 전수하고 이때 근초고왕이 일본왕에게 칠지도도 함께 보내게 됩니다.

남쪽이 안정되자 근초고왕은 북진을 시작하고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합니다.

(우리나라 4340년 역사상 전쟁터에서 전사한 유일한 왕입니다.)

 


5. 고구려의 부활


고국원왕의 아들인 소수림왕이 고구려의 왕이 되자 소수림왕은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연나라와 백제와의 연패의 원인을 국가 시스템의 부재로 판단한것이죠.

결국 소수림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고대 국가로써의 체계를 확실히 다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한 왕이 바로 고구려 태왕 광개토대왕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착실히 다져놓은 토대를 바탕으로 막강한 국력을 갖추게 됩니다.


 

6. 지역 구도의 변화


신라는 근초고왕이래도 백제와 가야 동맹에 끼여 극도로 위축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급속도로 부활하기 시작하자 신라 내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합니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의 부활이 점점 위기로 다가옵니다.

그러한 시점에 신라의 차기 왕권 후보 일순위인 왕자가 고구려로 유학 비슷한걸 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즉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상태가 발생된 것이죠.

좌시할수 없었던 백제는 신라에게 고구려로부터 떨어져라 라는 강력한 경고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7. 백제의 작전


그러나 백제가 신라를 직접적으로 공격한다면 그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확고한 동맹을 부추기는 상황이 될 것이고, 적당히 누군가가 신라를 겁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본을 앞잡이로 내세웁니다.

일본을 내세울 경우 일본의 공격은 새로울것이 없기 때문에 백제는 전면에서 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는 일본군에 대한 백제의 강력한 지원이 이전의 일본의 침입과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일본의 침입을 역사서에 몇번 있었다고 성의없이 기록하던 신라가 초긴장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일본군이 신라의 성을 함락시킨 것이죠. 

신라가 그제서야 일본의 뒤에 백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8. 고구려군 5만 출병의 의미


이 사실은 즉각 고구려에 전해지고 백제에 대한 복수전의 시점이 다가왔음을 깨닫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육로로 5만의 병력을 내려보내고 동해를 통해 해상 선단로 남하시킵니다.

즉 육로록 공겨하다 해상으로 도망치는 일본을 양쪽에서 잡겠다는 구상이였습니다.

또한 남해를 돌아 백제땅 어디론가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줄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압도적인 전력으로 백제를 기를 확 꺽어놓을 필요도 있었습니다.

 


9. 패권의 이동


결국 고구려의 병력은 가야를 정복하고 가야의 패권을 신라로 돌려놓게 됩니다.

다시 일본과의 관계는 불안정해지게 되고 일본은 이후로는 가야보다는 백제와 직접적인 교류로 돌아서게 됩니다.

신라는 견제하려던 백제의 작전은 고구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고, 이 지역의 패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하게 각인 시킵니다.

 

- 이것이 광개토대왕 5만 출병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 일본이 주장하는 임라 일본부 설은 고대 삼국의 역학관계상 전혀 드러맞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일본의 역사왜곡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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