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박2일을 보니 다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촬영했더군요.
4.3 사건때문인가? 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오늘 기사중에 그런 내용이 있네요..
아래는 4.3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주 4.3항쟁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반공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에 경찰은 3.1절 기념식에서 다소 격해진 시위에 폭도로 오해하여 제주도민에게 총을 쏘았다.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가해자인 군정경찰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오히려 제주도민을 '폭도'로 몰았다. 제주도민들은 경찰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은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추가로 파견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이로부터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여 명이 군경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미군정은 이어 5월 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경찰, 서북청년단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제주도 민중들은 미군정,군경,반공단체의 탄압때문에 한라산으로 들어가 항쟁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합의하기도 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져 민중들은 살 곳을 잃었으며,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군경과 무장대 사이에서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면서 애꿎은 제주 민중들이 희생된 것이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6년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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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은 단순한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여파를 남겼죠.
4.3사건 당시 제주도로의 파견을 거부한 국군부대를 진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되어 양민학살로 이어진 여순반란 사건이 있습니다.
또 제주도에서의 학살을 피하여 일본으로 탈출한 보트피플인들이 많이 발생하였죠.
일본 오사카에 사는 재일한국인중 유독 제주도 출신이 많은 이유라고 합니다.
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간이 있습니다.
제주도에 파견된 진압군 사령관인 유재홍입니다. 이사람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전의 원균인 이 사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무장 반군의 숫자가 대략 250명 정도로 파악되었는데, 공식적으로 밝힌 규모만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나옵니다.
마구잡이로 잡아죽여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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