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문산 전투
1951년 5월 용문산에서 화천저수지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한국전에서 국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다.
이 전투의 주인공은 한국군 6사단으로 중공군 63군단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6사단은 한국전 전투 시작시 춘천-홍천 전투에서도 기가막힌 승리를 거둔 부대였다.
포 한대로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한 인민군을 춘천호에서 완전히 틀어막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도주로 전선이 붕괴되어 가는 와중에도 홍천에서 57mm 전차포 3문으로 12대의 인민군 전차를 박살낸 영웅적인 승리를 거둔 부대였다.
그런데 불과 한달전 현리전투에서 중공군 1개 중대 병력에게 국군 1개 군단이 붕괴되는데 결정적 악역을 해버렸다. (영군군 1개 대대가 막아세웠다.)

<1.용문산 전투도>
6사단은 정찰선에서 도강하는 중공군을 공격한 후 주-저항선 전방 427 고지에서 다시 한번 저지한 후 주 저항선 까지 후퇴하여 방어하는 것이 작전이였으나, 427고지 방어 작전후 주 저항선까지 후퇴해야 할 2연대의 12대대가 후퇴하지 않고 그대로 중공군의 대부대를 틀어 막아 버림으로써 대승의 첫 스타트를 끊게 되었다.
국군이 여기서 강력하게 방어함으로써 중공군은 이곳이 주 방어선이라 오판하고 중공군의 주 전력을 퍼부었다.
이때에 6사단의 19연대와 7연대가 우회하여 중공군의 주공을 협공함으로써 중공군이 붕괴되어 버린다.
바로 인접 부대인 미군 24사단, 한국군 2사단은 중공군의 63군을 구출하기 위해 진출하게 될 다른 중공군 부대로 부터 서쪽 방면을 엄호하고
북한강을 도강하여 후퇴하는 중공군을 분쇄하기 위해 현리에서부터 지암리까지 진출하여 지암리에서 6사단 19연대가 중공군을 격멸하는데 공헌 한다.
뒤를 받치며 올라오는 미군 7사단을 후방에 둔채 시간이 부족하여 북한강을 도강하지 못하고 강안을 따라 도주하는 중공군을 쫓아 가평, 춘천을 지나 화천과 파로호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분쇄하며 승리를 얻게 되었다.
- 용문산 전투 지역 투어

<2.용문산 전투지 탐방 위치>
이 용문산 전투의 전투 지역을 쫓아가 보았다.
위 그림의 1~4 번 지역을 둘러보았다.

<3. 용문산 전투 기념탑>
용문산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용문산 북쪽 천안리에 위치해 있다.
바로 뒤쪽엔 미군 72전차 부대 참전 기념비가 있다.

<4.용문산 전투 부대를 기억할 만한 것이 없어서 한국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M113 보병수송차에 붙어있는 6사단 마크를 찍었다,>

<5.기념탑이 있는 이 일대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6.기념탑 주변의 산세를 찍어봤다. 용문산-유명산 일대의 산세가, 결코 쉽지 않은 전투를 벌였으리나 예상할 수 있다.>
용문산 전투를 사실상 승리로 결정 지은 지암리에 가봤다.
중공군 180사단 및 기타 다른 중공군 부대의 낙오병들이 지암리로 몰려들었고, 중공군은 지암리 북쪽으로 두갈래로 나누어 탈출을 시도하면서 북쪽의 중공군 181사단이 구원을 위해 지암리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통신 문제, 우천, 이미 주요 지점을 미군-한국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6사단 19연대가 뒤쫓고 있었기에 중공군의 탈출 작전은 실패했다.

<7.지암리에 왔더니 여기가 지암리 라는걸 찍을 만한게 없어서 도로명 간판을 찍어봤다.>

<8. 네비에 지암리를 찍고 왔더니 여기 초등학교로 안내해 줬다.
선생님과 학생 4명이 체육 수업중이였다.
역시 요즘은 시골학교가 시설이나 모든면에서 훨씬 좋은것 같다.
학교 건물 옥상에 시스템 에어컨 외부기도 있고, 뒤쪽에는 식당도 있더라. >

<9.지암리 초등학교 근처의 산세를 한번 찍어봤다.>

<10.춘천호가 끝나는 지역, 지암리 북쪽으로 이동하면 38선이고 여긴 38선 바로 너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세가 보인다.>

<11. 화천 초입의 북한강, 붕어섬이 보인다. 중공군은 반대편 강의 남안으로 도주해 왔을 것이다.>

<12.화천발전소>
6사단-2연대-3대대-10중대 병력이 5월 28일 저녁에 화천 발전소를 점령한다.
화천발전소는 중공군 지휘부와 보급소가 있던 곳으로 지휘부가 붕괴됨으로써 중공군은 마비되어 버린다.
이 전투로 중대원 전원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3.화천발전소 강 맞은편에서 사진을 찍었다, 자전거길 옆에 대형 관광 안내도가 있길래 찍어봤다.>

<14.파로호 선착장>

<15.파로호의 끝, 정면 저 멀리 물을 가두는 댐이 있다.>
화천발전소 뒤쪽의 구만리 고개 일대에 중공군 4개 사단 병력 2~3만명이 갖혀 있었고, 미공군의 네이팜탄 공격과 무제한 포격작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었고, 공격을 피해 파로호를 헤엄쳐 건너려던 병력의 상당수는 익사해 죽었다.
결국 남은 병력은 항복함으로써 용문산 전투는 이곳 파로호에서 끝을 맺게 된다.
파로호 주변 주민들은 사람고기 뜯어먹고 자란 물고기다는 이유로 몇년간 이곳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바람도 쐴 겸 이렇게 용문산 전투 지역을 한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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