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역사

임란시 조선군, 왜군의 복장

메롱씨티 배드맨 2016. 5. 7. 16:17

조선은 문자화된 기록은 차고 넘치는 반면 기록화는 별로 남겨놓지 않아서 오로지 텍스트만 보고 상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드라마화 같이 재생산되는 역사물의 심각한 고증 오류가 많아지는 것도 이런 기록화가 부족하기 때문과 더블어 애써 찾아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기록한 그림은 조선, 명, 왜 모두 의미있고 중요한 그림을 남겨두었다.

조선이 그린 기록화는 '평양성 전투 병풍도"(고려대 박물관),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보물 391호), 동래성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보물 392호)’, 임란이 끝나고 240년이 지나 화원 이시눌이 그린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가 있다.



1. 조선이 그린 평양성 전투도 (전후 200년후 작품)



명군 특유의 투구 모양을 확인 할 수 있다.

왜군은 원피스 차림에 투구는 없고 가운데를 밀어버린 헤어스타일 정도는 확인 할 수 있다.

그 뒤쪽에 보이는 왜군의 복장에서 특이한 점은 모두 신발을 신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왜 이게 특이한지는 다른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이 그린 전투도로는 울산성 전투도가 있다.

이 전투는 정유재난시 울산성에 포위된 왜군을 조-명 연합군이 공격한 전투였다.

조선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군이 철수해 버림으로써 끝내 함락은 면했지만, 

이순신 장군 이외에 왜군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긴 전투였다. 

이 전투 이후로 왜군은 승리에 대한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도망만을 생각한다.




2. 가 그린 울산성 전투도 - 전체중 복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만 캡춰 (전쟁 직후 작품)



울산성 전투도는 임진왜란 뒤에 치열했던 울산성 전투(1597년 12월23일~1598년1월4일)의 참상을 회고하면서 전투에 참가한 왜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문에서 군인들의 설명을 종합해 병풍 3개에 나눠 그렸다.

자뻑이 중국 못지 않게 강한 일본이 자신들이 패전한 전투를 정교한 그림으로 그려 남겨 놓았을 정도로 울산성 전투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전후에 일본인이 패전을 기록한 사례는 이순신을 아예 신의 반열로 올려버린 사례와 이 울산성 전투밖에 없다.

이 울산성 전투도는 사진 복사본이 울산 박물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그린 이 그림을 보면 당시 왜군의 복장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다.

성밖의 조-명 연합군은 모두 갑옷을 착용한 상태이지만, 성 안의 왜군은 간부급만이 갑옷을 입었을뿐 허리를 묶은 원피스에 맨발, 가운데를 밀어버린 투구 없는 복장이다.

그림 위쪽의 전사자의 사체를 보면 복장의 특징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번째 그림은 전후 200년후에 조선이 그린 그림이고, 

두번째 그림은 전쟁 직후 참전 내용을 직접 듣고 일본 화가가 그린 그림,

세번째 그림,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은 전투 현장에서 작가가 직접 보고, 직접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6폭 짜리 병풍도 2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반부 1세트는 스웨덴박물관에 보관중이고, 후반부 1세트는 영국에서 2012년 구입하여 국내에 들여왔다.


즉, 


세번째 그림이 가장 정확한 그림이고 

두번째도 현장 참가자가 증언, 감수를 했을것이므로 거의 정확하다고 볼 수 있고,

첫번째 그림은 사실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발도 신겼겠지..)





3.이 그린 정왜기공도권 중 순천왜성 전투 부분 - 현장에서 작가가 직접 보고, 직접 그린 유일한 전쟁 기록화 (전쟁중 작품)



현장에서 작가가 직접 본 왜군의 모습이다.

왜군의 주력인 조총병의 모습을 보면 허리를 묶은 원피스에 맨발, 가운데 머리를 밀어버린 투구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200년 후에 그린 평양성 전투에서는 왜군이 신발을 신은 것처럼 그려졌지만, 왜군 당사자나 현장에서 직접 관찰한 작가는 맨발을 묘사하고 있다.




4.정왜기공도권(원본은 이렇게 무채색이다) - 순천왜성 전투 중 왜성을 공격하는 조선 수군 부분



순천왜성 바깥 바다에서 공격하고 있는 조선수군의 모습,

조선군의 거의 공식(?) 투구 형태인 챙이 달린 철모를 쓴 군인의 모습이 보이고 조선군임을 표시하는 깃발에 태극 문양을 넣은 깃발이 보인다, 태극 주변의 팔괘만 빼면 대한제국 시절의 국기와 거의 흡사하다.

배는 판옥선이 아닌 상륙을 위한 방패선이거나 포작선일 가능성이 높다.


조-명-왜군 중 명의 수군 전력은 가장 형편없는 수준으로써 불과 백여년 전에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세계일주를 했던 명나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그래도 쪼들리는 이순신 장군이 명군의 형편없는 배를 보고 조선 수군의 배를 빌려줄 정도였으니 명-수군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된다.




 5.정왜기공도권 - 노량해전 부분 



그림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노량해전 부분이다.

임진/정유재난의 마지막 전투로 명군의 입장에서 명의 해전을 그리고 있다.

해전에서 명군이 무슨일을 했는지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는 그림이다.

앞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이 왜군 함선을 박살내면 뒤에서 이렇게 물에 빠진 왜군의 목을 베어 전공을 챙기는 역할을 했다.


물론 원래 명군의 역할은 전선의 좌우에서 왜군이 도망가지 못하게 잡고 있는 것이였지만, 전과에 눈이 멀은 명군은 조선군의 뒤에서 이런 뻘짓을 하고 있었고, 명군에 대해 극한의 인내심을 보인 이순신 장군의 분노게이지를 폭발 시킬만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명의 수군은 이순신의 작전에 전혀 도움은 안되고 방해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군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인지 진린은 선조가 이순신 장군의 포상을 제외하려 하자 명-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부당하다고 항의까지 했다.




엉망진창의 고증을 자료가 없다는 뻘소리로 커버치지 말자, 이 정도면 고증의 자료로 충분하고 조,명,왜 까지 모두 교차검증까지 가능하니 왜곡의 이슈도 없다.